최근에 읽고 읽는 책은 대중음악 평론가 김영대씨가 쓴 지금 여기의 아이돌-아티스트이다. 하루만 지나도 대중음악 특히 케이팝의 트렌드가 엄청나게 빨리 흘러가다보니, 케이팝을 인쇄매체로 본다는 것은 무언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낡아버린 신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2021년 6월에 출간된 책이라 꽤 날 것의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NCT로 시작해 BTS로 끝나는 이 책은 케이팝의 가장 따끈한 아이돌을 대부분(물론 에스파를 비롯해서 빠진 아이돌도 많다… 롱테일이 지배하는 아이돌을 빠짐없이 모두 리뷰하기란 힘든 것은 사실이다. 20년 전만 같아도 남돌은 HOT나 젝스키스 여돌은 SES나 핑클 이 정도만 해도 80% 이상의 팬들을 휘잡았을텐데 말이다.)은 리뷰하고 있다.
다만 개인의 취향 시대로 워낙에 많은 대중들이 각자만의 다양한 선호로 각양각색의 아이돌을 좋아하고 있기에, 한 평론가의 리뷰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동일한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아이돌에 빠지게 된 입덕 계기를 백명한테 물어보면 백명 다 천차만별일 정도로 취향이란 게 제각각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동안 내가 몰랐던 마치 나에게는 숨겨진 귀한 보물같은 아이돌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이달의 소녀다.
이달의 소녀는 2016년 9월부터 매달 한 달에 한 명의 멤버를 공개해왔다. 희진이 2016년 9월 25일에 처음 공개되면서 이달의 소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일정 멤버수가 채워지면 유닛으로 데뷔를 시작했다. 그 첫번째 유닛이 바로 이달의 소녀 1/3이다.
그리고 또 멤버가 공개되다가 이달의 소녀 오드아이써클과 이달의 소녀 yyxy까지 총 3개의 유닛이 등장했다. 이 3개의 유닛이 합쳐서 비로소 완전체인 이달의 소녀가 되는 프로세스였다.
이처럼 독특한 데뷔 프로젝트로 주목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희진, 현진, 하슬, 여진, 비비, 김립, 진솔, 최리, 이브, 츄, 고원, 올리비아 혜가 순서대로 선발되어 데뷔했다. 팀 인원은 총 12명, 3개의 유닛은 각각 4명씩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가 독특한 이유는 기존의 그룹 활동과는 완전한 역순으로 시작되었고 상당히 장기간동안 지속된 프로젝트로 100억 가까운 예산이 들어간 고액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한 그룹이 장르나 스타일 혹은 활동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유닛으로 활동하는 방식은 케이팝의 역사에 늘 존재해왔지만, 이달의 소녀는 그 지점을 역으로 파고들어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유닛이 되고, 여러 개의 유닛이 스타일의 곡들까지 그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그동안 아이돌 그룹은 먼저 데뷔한 후에 유닛으로 나눠져 활동을 하거나, 역량있는 솔로로 앨범을 내고는 했는데 솔로부터 나오고 그다음에 유닛으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완전체라니. 등장부터 상당한 호기심을 끌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이달의 소녀라는 팀 작명도 이중적인 의미의 워드플레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먼저 매달 한 명씩 소개되는 프로젝트는 마치 월간 구독 개념으로 이달의 소녀는 도대체 누구고 어떤 매력을 갖고 있을까? 호기심을 만든다.
매달 우리는 새로운 소녀를 만난다
그뿐만 아니라 LOONA 즉 달이라는 루나버스 세계관을 만들어서 12명이 모두 공개된 이후부터는 세계관을 확장해가고 있다.
이런 중의적인 의미는 팀 로고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바로 다음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한글명 초성을 ㅇㄷㅇㅅㄴ로 뽑아서 영문 로고 LOONA로 변형하고 있다. 상당히 의미있는 워드플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팬덤명에서도 나오는데 바로 ‘오빛’ ORBIT이다. 달이라 빛과 연결지은 오빛, 달이라 행성의 궤도(ORBIT)를 뜻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상당한 고민을 통해 마케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달의 소녀가 상당한 퀄리티의 음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대니얼 오비 클라임 덕분이다. 그는 이센스의 The Anecdote를 프로듀싱했는데, 이 앨범은 한국 힙합에서도 손 꼽히는 앨범으로 불린다.
또한 A&R 정병기 이사는 JYP와 울림엔터테인먼트를 거쳤던 뛰어난 안목을 소유하였기에, 이달의 소녀를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이 못지 않은 세련미를 구축할 수 있었다. 참고로 울림엔테테인먼트는 지금은 해체한 러블리즈의 기획사다.
덧붙여서 A&R이란 음악을 기획하는 아티스트 앤 레퍼토리(Artist & Repertoire, A&R)의 줄임말로서, 음반의 기획 과정을 통괄하는 직업이다. PM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A&R의 역량에 따라 아이돌의 매력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정병기 이사는 이달의 소녀에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영대 평론가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R 정병기의 비전은 이달의 소녀의 음악과 세계관에 충실히 적용되어 이들의 프로페셔널한 음악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달의 소녀는 루나버스라는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독창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케이팝에서 세계관 구축은 기본적인 요소로 점차 자리잡고 있는데, 최근에 에스파만 보더라도 너무나 이상할 것없이 자연스럽다. 이는 수많은 아이돌 중에서 차별화를 꾀하고 경쟁 우위 요소로서 핵심 역량의 하나가 되었는데, 가요는 기본적으로 서정, 즉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인데 아이돌에 인물적 특성 즉 퍼스널리티를 추가함으로써 인물 사건 배경의 서사적 세계관이 구축이 되면, 대중들은 서정만 드러날 때보다 더욱 몰입하게 되고 이는 결국 대중이 팬덤화되면서 아이돌과 팬의 일체감을 고양시키게 된다.
일찍이 소년소녀 소설, 롤플레잉 게임, 재패니메이션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받아온 케이팝은 서구 팝 음악에서 통상적으로 해온 개념적인 앨범 구성을 넘어서서 하나의 퍼스널리티, 아바타, 혹은 페르소나를 내세워 일관된 서사가 중심이 된 독립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세계관이 음악을 즐기기 위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선행 요소라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시스템을 통해 유사한 팀들이 쏟아지는 케이팝 신에서 팀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동시에 팬들이 보다 깊숙이 이들의 음악에 관여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기획사들, 특히 보편적인 대중보다는 마니악한 팬덤의 구축을 꾀하는 제작자들이 각별한 공을 들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달의 소녀는 각 멤버에게 부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개인 활동과 유닛 활동으로 확장되어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이 의미있다.
이달의 소녀에게 있어 또다른 특징은 팀을 대표하는 메인 보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SES의 바다, 핑클의 옥주현 등 걸그룹하면 떠오르는 그 목소리. 대개 그 목소리는 아이돌은 달라도 기획사마다 공통된 특성을 보이고는 한다.
이달의 소녀에는 SM이나 YG가 그러하듯 그들 기획사의 음악들에 면면히 흐르는, 그러니까 목소리'로서 회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메인 보컬리스트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대중적 인기를 노리는 그룹들이 응당 그러하듯 파워풀한 보컬리스트 한 명을 중심으로 그룹을 구성하는 식의 전형적 포맷을 따르지 않는다. 음악적으로 분명 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구성이지만, 청자의 입장에서는 레이블에서 내세우는 공식적인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고 음악이라는 콘텐츠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가장 콘셉트에 충실한 그룹이면서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음악에 집중하게 만드는 그룹이라는 점은 아마도 이달의 소녀가 가진 예상치 못한 매력이다.
위 글에서 설명하듯 이달의 소녀는 정체성이라 할만한 메인 보컬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모든 멤버가 다 메인 보컬의 실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럴만도 한게 이달의 소녀는 모두 솔로로 데뷔했고, 각자 유닛으로 모두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바꿔말하면 모두가 그런 출중한 실력을 보유했기에 이러한 데뷔 방식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달의 소녀의 음악은 현재 국내외에서 케이팝 신을 이끄는 최고의 프로들의 솜씨와 수완이 모아진 결과물이다.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주체는 바로 작곡가그룹 모노트리MonoTree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케이팝 아이돌을, 그중에서도 걸그룹의 세계관과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하는 톱클래스의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모노트리는 레드벨벳, 러블리즈, 여자친구, 아이즈원 등 다양한 곡을 작곡한 그룹으로 이달의 소녀 앨범에 절반이상의 곡을 작곡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히 많은 곡에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모노트리의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물이 이달의 소녀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할 정도다.
세계관이 어떻고, 멤버가 어떻든간에 아이돌은 결국 노래를 들려주는 아티스트. 그렇다면 노래가 듣고 좋아야지 그 아이돌에게 빠져들 것이다. 아무리 매력적인 아이돌이라도 결국 노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쉽게 덕질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사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결국 본질은 서정 즉 노래일테니까. 그러면에서 이달의 소녀 노래 중 두 곡을 추천하고 싶다.
첫번째는 버터플라이.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Butterfly> 싱커페이션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비트와 그에 어울리는 팔세토(매우 높은 음역대를 가성으로 부르는 창법)의 보컬이 '나비'라는 단어가 품은 우아한 몸짓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며 긴장감을 그룹들에 비해 음악적인 예측 가능성을 줄여주고 매 곡마다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상당히 몽환적이면서 중독적인 버터플라이. 개인적으로 처음 들었을 때 확 꽂히는 곡은 아니지만 두번째 들었을 때 어 좋은데? 세번째 들었을 때는 와 대박이다 했던 곡이다.
https://youtu.be/XEOCbFJjRw0
그 다음 추천곡은 하이하이(Hi High)다.
하이하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곡이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 곡이지 할 정도로 매력이 있고, 통통 튀며 가사 역시 상당한 위트가 있다. 버터플라이와 하이하이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의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느낌이 다른데, 모두 이달의 소녀가 자신만의 곡으로 완벽히 승화시키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https://youtu.be/846cjX0ZTrk
새로운 아이돌을 만난다는 건, 이제 단순히 노래를 새로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이 가슴 웅장한 일이 되어버렸다.
동시에 아직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자극이기도 하다. 오늘밤에는 루나버스로 빠져 보면 어떨까?
LOONA는 LUNAR에서 변형시킨 단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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