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웹소설

오래도록 새로운 하루(feat. 단편 웹소설 습작)

동사힐 2021. 10. 15.

안녕하세요. 작가 동사힐입니다. 

기존에 연재하던 웹소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전기는 잠시 휴재중입니다.

일신이 정리되는대로 이어서 연재를 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단편 웹소설 오래도록 새로운 하루를 공개하고자 합니다.

습작이라 많이 부족합니다만, 즐겁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v. 1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내 모습을 바라보면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걷고 있다. 사실 왜 걷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걷고 있다. 여기가 어딘지도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언가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 주변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함께 걷고 있다. 그들은 마치 경쟁이나 하듯 뒤쳐지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다. 나도 그 안에서 함께 걷고 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려 해도 앞이 보이지를 않는다. 앞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뒤를 돌아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따라 오고 있기에 내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수 가 없다. 사실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지금 내가 어느 길 위를 걷고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사실 난 의문이다. 왜 걸어야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계속 걸어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걷지 않으면 이 행렬 속에서 내가 존재할 수 없다. 오랫동안 함께 걸었으니까 내 말에 틀림없이 대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서 옆에 사람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오랜 망설임 끝에 말을 걸지만 옆의 사람은 대답이 없다. 이상하다. 다시 말을 건다.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다. 내 주변의 누구도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내 앞에 걷는 사람에게 물으면 신경질적인 반응과 함께 내 손을 뿌리치기만 한다. 그 순간에 내 옆을 스친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니 입이 없다. 입이 있던 흔적만 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입이 없다. 주변 사람들 모두의 눈빛에는 무언가 쫓기는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무엇에 쫓기는 지 다들 알고 있는 건 지 궁금하다. 나는 이 의문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를 파헤쳐 나가기로 다짐한다. 그러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변은 순식간에 빛으로 휩싸인다.

 

 

v. 2

아침이다. 꿈이다. 역시 꿈이었다. 매일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사실 그 무언가가 무언지 도저히 모르겠다. 처음에는 나 혼자서 쫓기더니 꿈을 꿀 때마다 점차 쫓기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나는 매일 꿈에서 나를 쫒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다짐만 하면 어김없이 들리는 어머니의 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난다.

 

“자영아 학교가야지. 얼른 일어나렴. 넌 대학생이나 된 녀석이 아직도 엄마가 깨워줘야 일어나니. 어서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학교가.”

 

어머니의 소리. 이 소리는 항상 새로운 하루(-동시에 나의 꿈을 끝내는)를 알리는 소리이다. 이 소리에 나는 무의시적으로 잠을 깨고 새로운하루를 맞이한다. 나는 왜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부모님은 이미 일어나셔서 직장에 나갈 준비를 모두 끝내셨다. 부모님은 나에게 학교에 늦지 말고 학교에가 가서 열심히 강의를 들으라는 당부와 함께 집을 나가신다. 그 말에 나는 늦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씻고 아침을 먹는다. 우리 가족이 맞는 새로운 하루는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부모님이 직장에 가고 집에 아무도 없는 아주 잠깐의 시간. 어쩌면 나에게 있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지금의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만을 위한 시간. 나만을 위한 공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이 시공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한없이 게으르고 나태해도 아무도 나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챙겨서 학교에 가기 위해 밖으로 향한다. 밖으로 나가기는 정말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간다. 혹시나 수업에 지각을 할까봐 버스 정류장까지 열심히 뛴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아직 늦지는 않았다. 괜히 뛰었다.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마을버스가 도착하고 나는 어색한 몸짓으로 탄다. 마을버스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마을버스를 타면 매번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항상 이 시각에 마을버스를 타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너무나 졸린 표정의 버스 기사 아저씨.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여고생. 이어폰에 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는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남학생. 항상 영어책을 끼고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잘 외워지지 않는지 표정을 찡그리며 있는 40대 중반의 아저씨. 좌석에 앉아서 항상 똑같은 화장을 고치고 있는 20대 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아가씨. 이 작은 마을버스 안에는 매번 똑같은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똑같은 모습으로 있다. 이제는 서로를 알 거 같은데 어느 누구도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사실 나는 너무도 마을버스안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매일 마주쳐서 서로의 얼굴을 알 듯도 싶은데 어느 누구도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 답답하기도 하다. 이 비좁은 마을버스 안에서 승객들은 모두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마을버스를 타고 있는 건가. 하지만 모두들 마을버스를 타면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나 역시 그 속에서 새로운하루를 시작한다.

이 마을버스는 의정부역에 도착한다. 마을버스를 탔던 승객들은 모두 내리고, 나도 그 속에서 따라 내린다. 버스에서 내리면 무가지 신문들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몇 개월 전만에 해도 한 종류밖에 없던 공짜 신문들이 지금은 종류도 다양하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그 신문들을 집는다. 나도 처음에는 공짜라고 생각해서 그 신문들을 집었지만 지금은 집지 않는다. 그 신문은 공짜가 아니다. 무가지 신문을 보는 대가로 쓰레기 같은 내용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상 그 신문들은 하나같이 모두 매일 똑같은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광고만이 매일 새롭다. 나는 광고를 보기 위해서 그러한 무가지 신문들을 보고 싶지는 않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전철 플랫폼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주변 사람 모두 똑같은 표정으로 전철을 기다리고 있다.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자주 보는 사람들도 많다. 옆에 서있는 사람이 아까 마을버스에서 내릴 때 나누어 주던 무가지신문을 보고 있다. 나도 모르게 무가지 신문으로 눈이 간다.

굿모닝 서울 ( Good Morning Seoul ) <사회면> 20xx년 xx월 xx일 목요일
이완용 증손자 결국 해외로 도주
- 이씨를 통해 사유재산 인정이라는 그동안 잊고 있던 우리의 정의를 다시 한번 깨달음

이완용 후손 윤형씨(64)는 시가 30억 원대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545 일대 712 평을 팔고서 해외로 이주를 했다. 이씨는 땅의 소유지와 관련한 2심에서 승소했고 그 땅을 인수했다. 결국 이씨는 한국에 아무 미련 없이 그 땅을 팔아버리고 이주를 했다. 당시 사건을 맡은 권성부장 판사는 이완용의 증손자가 재산을 돌려받는 것은 민족정의의 관념 에 어긋날 수 있지만 법률상 근거 없이 사유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위대한 자본주의가 흔들림 없이 지켜지며 사유재산의 인정으로 우리 사회에 여전히 정의가 법에 의해서 지켜짐을 이번 이씨의 땅 매각 후 해외이주를 통해서 여실히 보여줬다. 법과 제도가 흔들림 없이 유지될 때 이 사회의 정의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여론조사 결과
- 반민족 친일행위 청산을 원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 실시 결과 응답은 35.4%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응답자는 반민족 친일행위 청산보다는 경제발전에 힘을 쏟아주기를 원했다.
 
신행정수도 위헌판결
-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수호자. 헌번재판소
 
“김욱재판관을 포함한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로 이번 신행정수도 위헌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우리의 서울은 여전히 서울이며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사유재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도 이전은 위헌일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서울시민들의 사유재산에 막대한 피해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수도이전이라니 우리 천만 서울 시민의 기득권을 쉽게 넘겨줄 수는 없다. 역시 법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파수꾼임을 이번에도 증명했다. 권성 재판관은 대통령 및 국민의 여론으로부터 흔들림 없이 곧은 절개로 이번 판결을 주도하며 역시 위대한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수호자이며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법이 수호하는 법치국가임을 또 다시 증명했다.
생활인이 침묵하면 우리의 밥그릇이 날아갑니다!
오늘 오후 3시 광화문 네거리 4대악법 저지 국민행동대회로 모입시다!
간첩이 아니라면 지금 국보법 때문에 생활이 불편한 분들이 누구입니까. 개인 돈으로 학교를 세운 분들이 범죄 집단입니까. 반역자의 과오를 묵살하고 국가의 잘못만 캐내려는 사람들의 조국은 어디입니까.
 
4대악법이 통과되면 민족반역자 김정일 정권과 친북좌익세력이 우리의 삶터 대한민국을 분열, 파괴, 변질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이 조성됩니다. 국보법 폐지는 간첩에게 국가파괴의 자유를 줄 것이고 신문규제법은 악랄한 김정일과 무능한 좌파정권을 비판할 자유를 제한할 것입니다. 사학법 개악은 일종의 인민위원회가 사립학교를 접수하여 친북 교과서로써 400만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키우게 할 것입니다. 과거사법은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말살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경제 10대국으로 만든 것은 튼튼한 안보와 그 울타리 속에서 꽃핀 자유와 경쟁, 생산력과 창의력이었습니다. 4대악법은 자유민주주의 근간인 안보, 언론자유, 애국교육, 그리고 정통성을 뒤집어버림으로써 우리가 딛고 있는 삶의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변질시키고 우리의 밥그릇을 앗아갈 것입니다.
-국민 행동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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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지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유재산의 인정이 사회의 정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기사도 있다. 반민족 친일행위 청산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반민족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사회 고위층으로 지금은 보수라는 이름으로 아주 떳떳하며 자랑스럽게 기득권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을 청산을 하지? 그들을 청산을 해야 한다는 표현이 과연 맞는 다고 생각하는 걸까? 여론조사에 응답한 사람들은 친일을 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마치 강도처럼 숨어 지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의 청산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여론조사의 설문 문항을 만든 여론조사자와 그 여론조사에 응답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의 진실과 정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혼란스럽기 만하다. 역시 무가지신문을 집어 오지 않기를 잘했다. 앞으로 가져오지 말아야지. 나는 머리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어서 재빨리 시선을 신문에서 떼어 전철이 오는 철로위로 향한다.

전철이 온다. 전철은 항상 그 시간에 정확히 온다. 가끔 늦게 온 적은 있어도 거의 정해진 그 시간에 도착한다. 사실 전철을 타기는 너무 싫다. 전철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 속에 들어가 그 들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 싫다. 어떻게 전철 안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을 수 있는 지 참으로 궁금하다. 전철 안에서 대화를 하거나, 전화를 하거나,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어도 모두 다 똑같은 표정이다.

 

나는 무서워서 전철에 타기 싫지만 학교에 늦으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탄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늦지말라는 말만 하지 않으셨어도 타지 않을 텐데.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철에 올라선다. 전철 안에서 나는 혹시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봐 계속해서 거울을 쳐다본다. 하지만 전철만 타면 내가 주변 사람들과 다른지 다르지 않은지 알 수가 없다. 전철에 타기 전에는 내 표정이 주변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철에 올라서기만 하면 다른지 다르지 않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게 되니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과 다른 표정을 짓기 위해서 계속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갖가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아무리 표정을 지어 봐도 주변사람들의 표정과 내 표정은 똑같아만 보인다. 어떠한 날에는 너무 답답해서 전철에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싶기도 할 정도이다. 하지만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도 대답은커녕 내 말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묻지는 않는다.

끔찍한 전철 안에서의 긴장된 표정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30여분이 지나고 전철은 외대앞역에 도착한다.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재빠르게 뛰어 내린다. 전철 안에서 10분만 더 있으면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 정도로 아침에 전철은 똑같은 표정의 사람들로 꽉 찬다. 역을 빠져 나오면서 내일은 전철을 타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다짐을 어제도 했던 것 같다. 사실 이제는 전철에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어색하다. 전철을 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분위기에 익숙해 있는 건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러한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역을 빠져 나가 학교 정문을 향해 걷는다.

역시 학교에 들어오면 학교가 작아서 그런지 몰라도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마을버스 안에서 만큼은 아니어도 지하철에서보다는 확실히 낯익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아는 사람들한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싶지만 수업에 늦을까 겁이 나기도 하고, 저번처럼 인사를 했다가도 상대방이 인사를 무시할까봐 애써 참고 강의실로 들어간다. 학교에 다닌 지 2년째인데 2년 동안 익숙한 사람들끼리 왜 인사를 하지 않는 지 정말 의문이다. 1학년 1학기 초에만 해도 한 번 얼굴을 마주 대한 사람한테는 모두 다 인사를 했었다. 그런데 어느 새부터 내가 인사를 하면 다들 무시하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천천히 나의 발걸음은 인문관으로 향한다. 인문관에 내가 수업을 들을 강의실이 있다. 그런데 나는 강의가 듣기 싫다. 아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수님은 강의를 5분밖에 하지 않는다. 5분만 강의를 할 거면 왜 강의를 하는 지 난 이해할 수 가 없다. 인문관으로 들어가 강의실에 앉아있으면 무표정한 얼굴에 교수님이 들어오신다. 교수님도 아침 11시부터 하는 강의인지라 무척 피곤한 듯 보인다. 학생들도 아침11시까지 강의실에 들어오기가 벅찬데 교수님이라고 다를까. 교수님은 어제 밤늦게 까지 수업연구를 하다가 늦게 잠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피곤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교수님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교수님은 가방에서 출석부를 꺼낸다. 이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기 시작한다. 강의가 시작된다.

 

“이제 출석을 부르겠어요. 강승영”

 

“네”

 

“구자영”

 

“네”

 

“김가영”

 

“네”

 

“김도영”

 

“네”

 

“.....”

70여명이 넘는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모두 다 부르는 지금이 강의실에서 가장 활발하고 생기넘치는 시간이다. 교수님도 학생들도 모두 깨어서 활발하게 소통한다. 7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덕영”

 

“네”

 

“자 이렇게 출석은 끝났네요. 수업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어느덧 70여명이 넘는 학생들의 이름을 교수님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부른다. 출석을 부르고 나면 교수님의 강의도 끝난다. 이렇게 강의가 끝나면 이제 남은 2시간동안 교수님은 교단이라는 학생들과는 다른 공간에 서서 자신의 세계를 펼친다.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다. 교수님은 학생과 다른 공간에 있다. 교수님은 혹시 이러한 행위를 수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학생들은 출석이 끝나면 각기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학생들도 교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다. 몇몇 이상한 학생들만이 맨 앞좌석에 앉아서 교수님의 세계를 궁금해 하며 그 세계를 훔쳐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노력이 과연 성공적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학기 초에는 그래도 많은 학생들이 (-물론 전부는 아니다.) 교수님과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 노력을 했었다. 나도 노력은 했지만 교수님은 출석을 부를 때만 학생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출석이 끝난 나머지 1시간 55분 동안에 교수님은 다른 공간에서 교수님의 세계를 펼치기 때문에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70여명의 학생들과 교수님이 같은 공간에 있는 다는 사실이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나는 강의가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강의실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아침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강의 열심히 들으라는 말이 떠올라서 어쩔 수 없이 나가지 않는다. 2시간이 지나고 교수님이 밖으로 나가고 학생들이 모두 나가고 나면 그제야 나도 강의실을 빠져 나온다. 내일 아침에 아버지가 강의 열심히 들으라는 말을 혹시 잊어버리고서 나에게 하지 않는다면 강의를 듣지 말아야지. 이러한 다짐을 하지만 이 다짐을 어제도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영 좋지는 않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쳐다본다.

 

“야. 자영아. 여기서 뭐해”

누군가 내 등을 치면서 말을 건다.

 

“아 그냥 앉아 있어.”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같은 과 동기인 승호다.

 

“야 배고프지?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으응. 알았어. 밥이나 먹자.”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승호의 제안을 수락한다.

 

승호와 함께 학생식당을 가다 과 동기 두 명을 더 만나고 이렇게 네 명이서 점심을 먹는다. 승호는 왜 매일 나하고 점심을 먹는 이유를 알 수 가 없다. 점심을 먹는 동안 승호를 비롯한 과 동기들은 각자 자기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밥 먹느라, 자기 얘기하느라,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겨를이 없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 잔하고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사회과학관으로 간다.

이번 수업은 전공이라 아까 5분만 했던 교양수업과는 다르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키고 발표 수업을 맡은 학생들은 2시간동안 발표수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이 수업에서 나는 거의 매번 잠을 잔다. 학생들은 발표준비를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그대로 복사해온다. 도대체 인터넷에서 그대로 복사해서 해 올 거면 발표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가 없다. 가끔씩 몇 명 학생은 열심히 준비하는 것 같지만 그 학생들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준비해온 학생들의 수업 전부를 듣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냥 잠을 잔다.

사실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마을버스와 전철을 타고 오면서, 오전 교양수업을 들으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잠이 스르르 온다. 그렇게 나는 조용히 단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나는 2시간이 마치 5분인 듯 금방 잠에서 깬다.

 

“야. 자영아. 일어나. 수업 끝났어.”

 

“으응.”

 

“일어나서 술이나 마시러 가자.”

 

“술? 나 오늘 약속이 있어서 못 갈 거 같아. 다음에 갈께.”

나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아서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댄다.

 

“너는 술 먹자고만 하면 항상 약속이 있더라. 알았어. 우리끼리 갈께.”

 

이제 수업도 끝났으니까 집에 돌아가야지. 지금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다. 나에게 있어 학교에서 시간은 너무도 무의미하고 힘이 든다. 사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는데 힘들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 하지만 끔찍한 전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생각하면 난감하기만 하다.

 

v. 3

이런 생각에 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데 핸드폰으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지만 이번 전화는 왠지 안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자영이냐?”

 

“맞는데 누구세요?”

 

“나야 나. 민준이”

 

“민준이?”

 

“응 그래. 민준이.”

 

사실 나에게 민준이의 목소리는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목소리라 기억해내지 못할 목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민준이의 목소리가 아니다. 무언가 다르다. 힘이 없다. 예전의 그 자신감이 넘치던 민준이의 목소리가 아니다. 혹시 민준이를 가장하는 사람이 나를 놀리려고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에 나는 한번도 묻는다.

 

“정말 민준이 맞아?”

 

“응. 맞다니까. 야. 실망인걸. 아무리 2년만이라지만 벌써 내 목소리도 잊어버린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불알친구인 우리가. 실망이야.”

 

아니다. 내가 민준이의 목소리를 기억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민준이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상하다. 왜지. 이 사람은 민준이가 아니다. 아니다 만나서 확인을 해봐야 민준인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으.응.. 그래 민준아... 진짜 오랜만이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이 번호는 무슨 번호야?”

 

“아 나 핸드폰 끊긴 지 꽤 됐잖아. 공중전화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나 동전 얼마 안 남았어.”

 

“만나자고? 지금?”

 

“응.. 만나서 할 얘기도 있고 오랜만에 친구가 전화했는데 술이나 한잔 사”

 

“술?”

 

“응 그래 술.. 내가 요즘에 술을 못 마셨더니 아주 그냥 미쳐 돌아가실 지경이야. 지금 어디냐? 빨리 말해. 전화 끊기기 직전이다.”

 

“나 학굔데?”

 

“응 그러면 내가 학교로 갈게.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 학교 정문으로 5시까지 갈게. 있다가 보자.”

 

“알았어. 그럼 학교에 있을 테니까 학교 정문에서 5시에 보자.”

 

민준이는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다.

오랜만에 전화가 온 민준이다. 민준이. 초등학교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다. 민준이의 부모님이랑 우리 부모님이랑 아는 사이라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냈다. 민준이는 나와는 항상 달랐다. 민준이는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생각도 많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민준이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문득 중학교때 민준이와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자영아. 난 말이지. 대학에 가면 국문학을 전공할 거야.”

 

“국문학? 그걸 왜 하는 데?”

 

“문학속에는 삶이 녹아 있거든. 난 문학을 깊게 공부해서 삶에 대해서 고민도 하고, 내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빛나는 내 삶을 다시 문학에 녹이고 싶어. 글을 쓰면서 내 삶을 글 속에 드러내는 거야. 내 삶이 들어있는 문학은 곧 나의 철학과 내가 살고 있는 역사까지 반영을 하는 거지. 너 혹시 ‘문사철’이라는 말 들어봤냐? 들어봤을 리가 없지. ‘문사철’은 즉 문학, 역사, 철학의 줄임말이야. 즉 이 셋은 떨어질 수 없으며 함께 이해를 해야 한다는 의미야. 그러니까 아까 말했듯이 내 삶을 고스란히 문학에 투영시킬 수 있어야지만 진정한 문학이 되는 거고. 삶과 유리된 문학은 문학이 아닌 거야. 멋지지 않냐?”

 

“글속에 삶을 투영시킨다고? 무슨 소리야?” 사실 민준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음... 나만의 빛깔. 나만의 생각으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거야. 글을 씀으로 나는 살아있음을 증명하게 되지.”

 

“글을 쓰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왜 굳이 대학에 가서 전공으로 배워? 그냥 글을 쓰면 되는 거 아냐? 문학작품이야 얼마든지 읽으면 되는 거잖아. 굳이 대학에 가서 배울 필요가 있어?”

 

“음... 역시 넌 어려. 바보야. 생각해봐. 대학에 가면 국문학만 공부할 수 있잖아. 지금은 너무 쓸데없는 공부를 많이 하잖아. 주변에서는 마치 우리가 국어, 영어, 수학등을 배우지 않으면 무언가 큰일이나 날 듯 말하지만 사실 아무 일도 안 생기거든. 우리가 그러한 여러 과목을 공부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중학생이기 때문이야. 주변에서 중학생은 그러한 쓸데없는 과목을 공부하면서 시간이나 때워라 이거지. 그런데 대학에 가면 국문학만 해도 되잖아. 그러니까 대학에 가서 국문학을 할 거야. 그리고 대학은 분명 중, 고등학교 때와는 무언 가 다르고, 깊이 있게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삶에 대한 경험도 할 수 있을 거 아냐. 내가 진정 원하는 문학. 이것을 대학에 가면 배울 수 있고 직접 할 수 있는 거라고. 이제 좀 알겠냐?”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민준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몰랐다. 실상 나는 지금 내가 왜 중학생이어야 하는 지를 잘 몰랐다. 그냥 부모님이 중학교를 다니라니까 다닌다. 어쩌면 민준이 말대로 대학에 가기 위해 중학교에 다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민준이처럼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다. 대학에서 가서 하고 싶은 공부가 없는 나는 그러면 지금 왜 중학생이어야 하지? 지금도 내가 왜 그 때 중학생이었는지 의문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실 민준이도 그건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민준이는 가끔 나한테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워낙에 많은 글들을 보여줬지만 그 내용은 하나같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역사책과 철학책을 읽고 쓴 서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민준이가 쓴 글이라서 읽었다. 사실 민준이의 글은 대부분 한번 읽고 그냥 잊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고1때 민준이가 붉은 색 표지의 책을 읽고 쓴 서평을 잊을 수 없다. 해방 후 남조선을 점령한 미군정의 귀속재산처리문제와 6.25전쟁에 대한 내용과 관련된 역사책을 읽고 민준이가 써서 나에게 주었던 글로 기억한다.

사실 그 내용은 별 거 없었다. 해방 후 남쪽을 점령한 미군정이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 즉 적산의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부분 반민족 친일파들의 손에 넘긴 내용과 6.25전쟁이 도대체 어떠한 정의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과 지주 및 자본가등 사회의 보수, 기득권층을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며 과연 그것이 정의로운 가에 대해서 회의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민준이가 고민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글을 잊지 못하는 것은 민준이가 쓴 글 내용 때문이 아니라 당시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우연치 않게 민준이의 글을 보게 되었고 민준이는 그 날 담임한테 정말 비 오는 날 개 패듯 맞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민준이가 그 날 왜 그렇게 심하게 맞은 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민준이와 순탄치만은 않은 학창시절을 보내고서 결국 민준이는 국문학과에 진학하고 나는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사실 나는 경영학과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좋은 기업으로 취직이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경영학과에 가라고 했기 때문에 경영학과에 지원했고 합격을 했다. 나에 비하면 민준이는 참으로 복 받은 녀석이다. 민준이는 중학교때부터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국문학과에 갈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부모님은 이상하게도 민준이가 국문학과를 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뻐하지는 않고 혀끝을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쯧쯧. 민준이는 어쩌려고 국문학과에 갔는지 몰라. 국문학과에 가면 취직도 안 되고 돈도 못 버는데 말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자영아 너는 참 복 받은 거야. 네가 간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면 취직도 잘되고 돈도 엄청 잘 번다더라. 우리 자영이 중, 고등학교때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구나. 이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다.”

 

사실 어머니가 나보고 복 받았다고는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내가 그렇게 복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난 부모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민준이가 무척 부러웠다.

 

v. 4

대학생이 되니까 확실히 학창시절과는 달라졌다. 아니 달라지길 바랐고 달라졌다고 생각하니까 달라진 거 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강의시간표도 짤 수 있었고 강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예전처럼 구속하는 존재도 없었고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아들이 좋은 대학 경영학과에 다니는 것이 마치 자신이 다니는 듯 마냥 기뻐하셨다. 부모님이 기쁘니까 나도 기뻤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오랜만에 민준이로부터 연락이 와서 우리 동네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민준이는 대뜸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야 대학이 뭐냐?”

 

“응? 무슨 소리야.”

 

“대학이 뭐냐고.”

 

“대학이 뭐긴 뭐야 대학이지”

 

“그런데 왜 중, 고등학교 때하고 달라진 게 없지?”

 

“응? 달라진 게 없다니 무슨 소리야”

 

“달라진 게 없어.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사실 민준이가 무슨 의미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지 하나도 몰랐다. 왜 달라진게 없지? , 고등학교 때하고 달라진 게 얼마나 많은 데 말이다. 민준이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지 이해가 안갔다. 민준이는 그날 술을 엄청 마시고 뻗어서 집에 들어갔다.

그 날 이후로 민준이하고 연락은 없었다. 나도 나름대로 바쁘다 보니 민준이한테 연락을 하지 못했고 민준이도 나름대로 바쁘니까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부모님께서 대화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게 되었다.

 

“민준아빠가 빚보증을 잘못 섰다며.”

 

아버지가 무척 안타까운 듯한 음성으로 그런 말을 했다.

 

“아마 적금에다가 집까지 통째로 보증을 섰나 봐요.”

 

어머니도 무척이나 딱하다는 듯 한 말이었다.

 

“민준아빠네 회사가 자금이 부족해서 민준아빠가 보증을 서서 그 자금으로 돌렸나봐. 그거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나보더라고.”

 

“민준아빠는 회사로부터 급여도 6개월 이상 못 받았다면서요.”

 

“응. 민준아빠가 너무 사람을 잘 믿다가 결국 급여도 못 받고 집까지 다 날리게 생겼지 뭐. 민준엄마는 그래도 6개월 넘게 그나마 그동안 모았던 돈만으로 생활하다가 이제 돈도 다 떨어졌던 모양이던데.. ”

 

“그러게요. 민준네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하겠어요. 민준이네가 어디 도움을 받을만한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준이랑 민혜 당장 그 둘이 불쌍하네요. 민혜는 내년이면 고3인데. 민준이 학비도 당장 없던 거 같던데”

 

“그러게 말이요.”

 

잠결에 이러한 말을 들으면서 다시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민준이한테 연락 한 번 해봐야지. 잠결에 이러한 마음을 먹었었지만 또 정신없는 하루에 그냥 넘어갔다. 그러다가 민준이한테서 먼저 연락이 온 것 이었다.

 

v. 5

이런 저런 민준이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민준이와 약속시간인 오후 5시였다. 핸드폰을 보면서 연락이 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저기서 민준이가 걸어온다. 그런데 왜 인지 걸어오는 모습이 힘이 없다. 민준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걸어오는 듯 하다. 못 본지 2년이 다 되어가니까 많이 달라진 걸 거야. 속으로 생각해보지만 그래도 많이 달라졌다. 민준이가 아닌 것 같다. 예전의 힘있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던 그 모습이 아니다. 분명 외모는 민준이가 맞는데 행동은 민준이가 아니다. 혹시 누가 연기를 하는 건가.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에

 

“자영아. 야! 뭐해.”

라며 민준이가 어느새 다가와 나를 툭 친다.

 

“응.. 민준아.. 왔어?”

라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민준이인지 의심스러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민준이를 쳐다본다.

 

“야 오랜만에 친구를 봤으면 반가워해야지 이게 뭐야. 얼빠진 녀석처럼. 뭐 너야 옛날부터 얼빠진 인형처럼 다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학에 가서도 변함이 없냐. 요새도 부모님 말 잘 듣고? 하여튼 야 나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분명 민준이는 농담을 하는데 무척 힘이 빠진 듯한 전혀 유쾌하지 않은 농담이다.

 

“응 그래.. 밥부터 먹자.”

 

아무리 2년 만에 본 친구라도 이렇게 달라졌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선 밥집에 발을 디뎠다. 밥집에서 민준이는 이것저것 시킨다.

 

“자영아 잘 지냈냐?”

 

“나야 뭐.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무슨 일이기는 우리 하도 오랜만에 보지 못해서 너 얼굴 잊어먹기 전에 보려고 연락했지 뭐.”

 

“그랬구나.”

 

밥이 나오고 민준이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야 나 밥 못 먹은 지 꽤 된 거 같아.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밥 먼저 먹고 얘기하자.”

 

민준이가 많이 배가 고팠나 보다. 절대 말도 안하면서 밥만 먹는다. 순식간에 민준이는 어느새 밥을 다 먹고서 말을 꺼낸다.

 

“아 정말 잘 먹었다. 오랜만에 배에 따뜻한 밥이 들어가니까 살만하다. 그런데 오늘 너한테 갑자기 연락한 이유는 사실은 나 군대가. 일주일 후에 306보충대로.”

 

민준이는 무척 어색하게 뒷통수를 긁으며 말을 한다.

 

“응? 군대?”

 

사실 놀랍다. 민준이는 한창 나이에 군대를 가야하는 것은 분단이라는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사회가 만들어낸 악습이며 민준이 자신만은 이러한 악습에 동조할 수 없으며 그 나이에 군대의 의무를 지키는 것보다 젊은 나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글을 써야한다면서 군대에 엄청난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군대라니.

 

“응. 별로 가고 싶지는 않은데. 가게 됐어. 그래서 가기 전에 너한테 술이나 사라고 전화한거야. 자식 고맙지? 내가 전화 안했으면 넌 나 앞으로 2년 넘게 보지도 못해. 그러니까 고맙지? 고마울 거야. 당연히 고맙지. 고마운 의미로다가 밥도 네가 쏘고 술도 네가 쏴. 알았지? 이제 밥 다 먹었으니까 술 얼른 먹으러 가자.”

 

“응... 그..그래...”

 

갑자기 뒷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다. 민준이는 정말로 군대에 가기 싫어했던 애다. 가기 싫어했다기 보다는 군대 자체를 정말 미치도록 싫어했다. 작가 김승옥을 예로 들면서 20대 초반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때 글을 써야한다고 주장하던 애다. 또 군대라는 폐쇄적인 조직에 엄청난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애다.

항상 군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군대에 있으면서 상부로부터의 명령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사람을 사회에서도 그러하도록 세뇌시키고, 보이지 않는 적을 보여줌으로 이 사회를 더욱 굳건히 유지시키는 사회 유지 수단이라고 말하던 애다. 도대체 군대가 어떠한 가치를 위해서, 어떠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며 군대라는 조직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며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몸서리를 치던 애다. 이렇게 군대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던 애가 이렇게도 쉽게 군대에 가기로 마음을 정하다니. 무슨 일이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민준이와 함께 들어간 곳은 소주집이다. 민준이는 오랫동안 소주가 그리웠다면서 몇 가지 안주와 소주 한병을 시킨다. 나는 여전히 민준이가 왜 그러는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민준이가 그런 나를 가만히 두지는 않았다.

 

“자영. 너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냐. 형님이 군대간다니까 슬프냐.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연락도 안하고 말이지. 술이나 한잔 따라봐”

 

“내가 연락을 안했냐. 저번에 전화하니까 없는 번호라고 하던데? 핸드폰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연락을 해”

나는 소주를 따르며 말한다.

 

“사실 핸드폰이 없으니까 정말 연락이 안 오기는 하더라.”

 

민준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한잔했다.

 

v. 6

정리되지 않은 채 거의 산발인 지저분한 머리. 예전의 그 하얗던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심한 고생의 흔적으로 가득한 얼굴. 민준이는 그렇게 너무도 변해서 지금 내 앞에 있었다. 나는 갑자기 민준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너무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민준이한테 마지막 관심을 가졌던 날은 민준이네가 이사한 다음날이었던 것 같다.

 

“민준이네가 어제 이사 갔다면서요. 어디로 간데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묻는 소리를 나는 잠결에 듣고 있었다.

 

“모르겠어. 어디 월세방으로 간다던데.”

 

“결국 이사갔네요. 에휴. 걱정이네요. 요즘 살기 힘든데 말이에요. 민준엄마는 따뜻한 물 없으면 씻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살지 참 걱정이에요.”

 

“그러게 말이요. 민준네가 집까지 뺏기고 적금통장까지도 모두 다 차압당하고서도 빚이 천만원이 넘는다더라고. 그것도 민준아빠가 다니던 회사의 빚 중 일부를 민준아빠 이름으로 빌렸다던데. 사장이란 놈이 도망가서 문제가 이처럼 커진 거더라고.”

 

“완전 그 회사의 사장 몹쓸 사람이네요. 민준아빠 같은 순진한 사람을 급여도 안 주고 고용해먹더니 결국 회사 사장은 뺑소니나 치고 말이죠.”

 

“그러게 말이요. 그 회사 사장이란 놈이 민준아빠한테 이사라는 감투만 씌어주고 급여는 주지 않고 민준아빠 이름으로 죄다 보증을 섰나보더라고,.. 앞으로 민준네가 어찌 살지 참 걱정이야.”

 

민준이네가 이사를 갔다고? 그렇게 오래 한 곳에 살던 애들이 어디로 가지? 이런 생각을 잠결에 하며 다시 나는 잠을 잤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민준이가 다시 나한테 말을 건다.

 

“야 너는 어떻게 지냈냐? 뭐하면서 살아 요새는?”

민준이는 벌써 1병을 다 비워간다.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자작을 했다. 술도 약한 녀석이.

 

“그냥 뭐 학교 다니고 그러지 뭐. 특별히 하는 건 없어. 너는 어떻게 산거야? 갑자기 왜 군대야?”

 

나는 아직 한잔도 입에 대지는 않았다.

 

“어쩌다 보니까 가게 됐어......”

 

불현듯 스친 민준이 눈에 약간의 물기를 나는 느낄 수 가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나는 민준이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영아. 너 우리 집 작년 10월 말에 이사 갔던 거 알고 있었지?”

민준이는 소주 1병을 더 시키면서 나한테 말을 꺼낸다. 술이 약한 민준이는 이미 취해있다.

 

“....응...”

잠결에 부모님께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다. 민준이는 취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말이 많아지기 때문에 약간 걱정이다.

 

“이사 가기 전에 정말 우리 집 하루도 엄마와 아빠가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어. 사실 아빠가 밀린 월급이 거의 7개월이 넘어가면서 매일 부모님 두 분은 싸우셨어. 아빠가 월급을 몇 개월째 못 받아오니까 엄마는 왜 돈도 못 받아오냐고 매일 아빠를 닦달한거지. 그렇게 돈도 못 받아올 거면 그런 돈도 못주는 잘난 회사 잘난 이사자리 그만두고 다른 일이라도 해보라고. 하지만 울 아빠는 워낙에 성미가 맺고 끊음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그냥 잘 되겠지 그러며 계속 다녔지 뭐.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안 되고 엄마는 아빠가 돈은 못 벌어오는데 나랑 내 동생 민혜한테 돈 쓸 일은 많으니까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야. 정말 작년 3월부터 10월까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집안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날이 없었어.”

 

“그랬구나.....”

 

“그러다가 일이 터진 거지. 아빠가 빚보증을 섰던 사실을 엄마도 알게 된 거야. 아빠가 비밀로 해도 엄마가 모를 수 가 없었지. 그때는 이미 아빠 명의로 된 모든 통장과 적금은 정지가 되어 있었고 집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찾아왔으니까. 엄마는 아빠한테 막 따져 물었고 며칠 후에 결국 집에 차압까지 들어왔어. 집이 결국 경매로 넘어가게 된 거야.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월세를 가까스로 얻어 이사를 갔지. 월세로 이사 간 뒤에 아빠는 한번도 집에 들어오지 못하셨어. 그때는 이미 빚쟁이들한테 쫓기는 신세였고 아빠는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면서 도망간 회사사장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시는 거지. 사실 엄마가 이사를 결정한 건 빚쟁이들이 날마다 찾아오니까 견디다 못해 거의 도망가듯 간 거였어. 아빠한테 가끔 연락이 오기는 하는데 어디에 계신 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 아빠는 그래도 민혜한테 꼬박 연락하시는 거 같았는데 요즘에는 민혜한테도 연락을 안 하시는 거 같아.”

 

“음..”

민준이네 집안사정이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

 

“이사를 간 후에 정말 집에 돈이 하나도 없더라. 돈이 하나도 없을 줄은 정말 몰랐어. 엄마 통장에 돈이 조금 있었는데 그것도 겨우 보증금으로 내고 나니까 당장 생활비도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이 20년넘게 집안일만 하던 우리 엄마는 급식소에 나가셔서 일하시게 되었고, 나도 우선 급한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 그 때 고2인 민혜는 당장 학원비가 없어서 학원을 그만두기까지 했어.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아침에, 정말 말 그대로 눈 뜨고 나니까 갑자기 삶이 변하더라. 그렇게 새로 이사 간 월세집에서 정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엄마가 급식소에 나가신지 일주일도 채 안되어서 허리를 다치신 거야. 사실 집안일만 하시던 엄마에게 아침 7시부터 저녁 5시까지의 급식소일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고, 엄마가 급식소에 나가기 전에도 엄마의 허리는 그다지 좋지 못하셨거든. 결국 엄마는 집에만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어. 병원에 입원할 비용이 없으니까. 병원에 입원할 비용은커녕 당장 내일 먹을거리도 집에 없는데 어떻게 해. 우선 돈이 가장 급하니까 결국 1학년 2학기가 한달정도 남았는데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만 했어. 사실 학교에 갈 차비도 없어서 학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어. 아침부터 편의점에서 오후 4시까지 일을 하고 4시부터는 술집에서 새벽 1시까지 일했어. 그리고 집에 오면 2시가 넘어서 2시부터 잠깐 4시간 자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9시까지 주유소에서 일했지.”

 

“...”

민준이가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술이 취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말려도 끝없이 말한다. 이럴 때 어쩔 수 없이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어야 한다.

v. 7

“이렇게 일하니까 정말 힘들더라. 오전에 일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기고 저녁에는 서빙하는데 정말 서있기조차도 힘들더라. 정말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야. 해보지 않으면 몰라. 그리고 새벽에 주유소에 나가기 위해 일어날 때는 정말 온 몸에 쇠덩이를 달고 일어나는 느낌이야. 일어날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새벽에 밥은 먹을 수 있냐. 그냥 굶고 주유소에서 일하는 거지. 그래도 주유소 일 끝나면 편의점에 가서 어제 팔다 남아 유통기한 3시간 지난 삼각김밥으로 아침하고 점심을 때울 수 있었어. 정말 그 때 먹은 삼각김밥 맛은 잊을 수가 없어. 그렇게 처음에는 며칠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할 만 할거야라고 생각하며 참으면서 했는데 잠이 부족하니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힘들더라. 하지만 어쩔 수 가 없더라고. 나 같은 학생이 뭐 특별한 기술이 있냐, 그렇다고 어디 취직이나 되냐, 그렇다고 요즘같이 경기가 좋지 않을 때 과외라도 구할 수 있냐. 또 과외 구하려고 하면 대부분 명문대 좋은 학과에 다니는 학생이나 혹은 여학생들만 원하지 나같이 국문과에 다니는 남학생은 원하지도 않아.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시급2100원에서 3000원사이의 아르바이트밖에는 없지. 하루 20시간 죽어라 일을 하니까 어느 정도 돈은 생기더라. 그렇게 정말 힘들게 돈을 벌면 그걸로 동생 학비 되고 엄마 약값내고 월세 내고 남는 돈 모아서 통장에 입금하고. 사실 이렇게 일해서 돈을 모으면 다음 학기에는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 같다는 희망이 있었어. 그 때는 다시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어. 이렇게 내년에 2월까지 4개월 정도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모으면 내년 학기는 등록금도 마련할 수 있고 저녁이나 주말에 알바만 하면 생활비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사람의 수중에 돈이 없으니까 항상 어떤 무얼 하기 전에 돈부터 걱정하게 되니까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 당장 밥도 못 먹고 엄마는 아픈데도 병원도 못가고. 차비도 없는 데 어딜 갈 수도 없고 말이야. 거기다가 동생은 예비고3이라 얼마나 예민한데. 또 무얼 하려고 해도 이건 돈이 얼마니까 안돼. 이건 돈이 어느 정도 필요하니까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해. 이런 생각들. 정말로 돈이 없으면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

민준이는 어느새 만취가 되어갔다. 민준이는 취하면 정말 말이 많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1년동안 생활하면서 느낀 건데 돈 없으면 인간 취급도 못 받아. 돈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사고 잠도 못자.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해. 책을 읽을 시간이나 글 쓸 여유도 없어. 그 시간에 잠을 더 자야된다는 생각밖에 안드니까. 또 맨날 월세 내라고 독촉하는 데 그거 정말 듣기 싫은 소리다. 그래도 돈 없으면 집안이라도 화목해야하는데 그렇지도 않잖아. 요즘에야 아빠가 빚 때문에 도망 다니면서, 회사 사장 찾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으셔서 아빠랑 엄마랑 싸우지는 않지만, 예전에만 해도 돈 때문에 집안에 싸움 안 날 날이 없었어. 거기다가 동생은 예비고3이니까 나름대로 불만이지. 돈 없어서 남들 과외 받고 학원 다닐 때 자기는 그런 거 못 받는다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교 못 간다고, 다 집안에 돈 없는 탓이라며 매번 불만이지. 정말 이런 생각들만 하면 집안에 들어가기도 싫더라. 점점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거기다가 그렇게 하루 20시간 일하고 4시간 자면서 일했을 때는 사실 어떻게든 다시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맘에, 학비 마련하려고 그랬던 건데, 그렇게 일하니까 두 달도 못 버티겠더라. 도저히 몸이 남아나지를 않더라고. 결국 병이 나서 한 3일 동안 일을 못 나갔더니, 결국 일하는 데서 다 짤린 거 있지. 처음에 일하던 곳 사장님한테 찾아갔더니, 연락도 없이 안 나왔다고 자신이 엄청 손해 입었다고 그러면서, 그동안 일한 급여를 주지 않겠다는 거야. 정말 당황스럽더라. 그래도 몇 번 찾아가 따져서 급여를 겨우 받고 다른 곳에서 다시 일자리를 구했지. 사실 일자리 구하는 것도 정말 쉽지는 않았어. 그리고 전처럼 4시간 자고 나머지 시간은 계속 일하는 것도 못하겠더라. 도저히 힘들어서. 그래서 그냥 편의점에서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일하고 오후 4시부터 새벽1시까지 갈비집에서 일하기로 했어. 그런데 이렇게 일해도 나에게 남는 돈은 정말 조금이야. 월세며 생활비며 교통비며 무얼 하려고 하면 다 돈이니까 돈이 모일 리가 없잖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커녕 당장 내일 무얼 먹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게 너무도 견딜 수 가 없었어. 그리고 이렇게 내가 일만 하는 삶이 되어 버린 현실이 과연 나로 인해서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터질 거 같더라고. 내가 이렇게 일한다고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이러고 살고 있으면 정말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다가 살 거 같은 두려움이 들어.”

 

“...”

민준이가 그동안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았던 걸 가장 친한 친구라는 내가 몰랐다는 게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민준이의 말이 언제쯤 끝날지 시계를 보았다. 벌써 밤 9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끝날 때도 됐다.

 

“그래 집안만 이러면 말도 안해. 돈이 당장 없으니까 여자친구도 헤어지자고 하더라. 돈을 만들려면 시간을 포기하고 시간을 돈으로 바꿔야 하는데 여자친구 만날 시간은 당연히 줄잖아.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래도 가끔씩 만나면 여자친구한테 돈을 쓰지를 못하니까 여자친구 만날 엄두도 안 나고 여자친구는 여자친구 나름대로 내가 돈이 없으니까 만나도 할 게 없잖아. 사실 여자친구 만나면 다 돈쓰는 일이잖아. 어디 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밥 한끼만 먹어도 돈인데 난 정말 만원짜리 한 장이 아깝고 여자친구가 이런 사정 아니까 자기가 내다가도 결국 먼저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사실 내가 당장 힘드니까 여자친구를 챙겨줄 마음의 여유도 없어. 여자친구보다 내가 우선이고 이러니까 당연히 헤어질 수밖에 없지. 정말 돈 없어도 사랑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거다 거짓말이야. 돈 없으면 사랑 못 해. 돈 없으면 아예 여자를 만날 엄두도 안나. 마음속에 사랑할 여유조차 없거든.”

 

“...”

나야 사랑을 해보지 않았으니 돈 없다고 사랑을 못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사랑하는데 돈이 꼭 필요한가이다. 사람이 사랑을 하는 거지 돈이 사랑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돈이 없으면 타인을 사랑할 여유조차도 사라지는 걸까.

 

“사실 돈이 없으니까 무얼 하는데도 다 제한이 생기더라. 영화 한편보고 싶어도 어디 나가고 싶어도 너무 힘들어서 술 한잔해서 힘든 거 다 잊고 자고 싶지만 술 먹으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잖아. 전철만 타는데도 돈인데 정말 너 그거 모르지. 정말 어디 나가기 전에 돈 먼저 걱정하는 거. 그것도 만원 2만원도 아니고 차비가 없어서 밖에 나가기가 꺼려지는 거. 사람이 할 짓 못된다. 정말 미칠 노릇이고 엄청난 스트레스야.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일해도 결국은 집에 다 쓰고 마치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말이지. 정말 힘들어. 이렇게 바쁘니까 당연히 친구들 만날 시간은 없고 만나도 돈부터 걱정되고 맘 놓고 놀지도 못하는 건 당장 낼 있을 아르바이트 걱정이고 정말 이것저것 부담이었어. 스트레스만 생기고.”

 

“...”

사실 돈에 대해서 깊게 생각을 안 해봤지만 민준이 말 들어보면 그런 거 같기도 하다. 나야 부모님 두 분이 돈 벌어다 주니까 돈에 대해 걱정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민준이 말대로 돈이 당장 한 푼도 없다면 나가지를 밖에 나가봐야 갈 곳도 없을 테니 말이다. 돈이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고 있는 거다. 돈이 없으면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돈이 있어야 돈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이러니까 자연스럽게 친구들하고 멀어지고 거의 매일을 일만 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결국 핸드폰 요금도 못 내고 결국 핸드폰마저 잃어버리니까 정말 세상과 고립되더라. 그나마 핸드폰이 있을 때는 간간히 친구들한테 문자도 오고 아직 친구들이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이 위안이었는데 말이지 핸드폰이 없으니까 어디에서도 연락 오는 데도 없고 연락할 데도 없고 정말 핸드폰이 없으니까 너무도 절망적이었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느낌. 너무도 견딜 수가 없었어.”

 

“...”

핸드폰이 없으면 어디에도 연락을 못하는 건 사실이다. 누구한테도 연락이 오지 않고 나조차도 연락하지 못한다. 핸드폰은 사람사이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데도 이제 핸드폰이 없으면 타인과의 연락은 꿈에도 꾸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도대체 핸드폰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서로 간에 어떻게 연락을 하고 소통을 했는지 궁금하다. 민준이의 눈은 점점 풀려간다. 이제 민준이의 말이 점점 줄어들며 했던 한번 했던 말을 계속 하면서 자신이 했던 말들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민준이가 정말 많이 취했음을 의미한다.

 

“돈이 있어야 핸드폰을 사지. 핸드폰을 사도 핸드폰요금 낼 돈은 없고 그러던 중에도 나는 정말 글이 너무도 쓰고 싶은데 말이지. 쓸 시간도 없고 일하지 않을 때는 내일 일을 위해서 쉬어야 하니까. 쉬지 않으면 일 못하니까. 도대체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겠어. 엄마의 허리는 병원에서 물리 치료를 제대로 받지를 못하니까 점차 악화되어서 누워만 계셔도 통증을 느낄 정도로 심해졌고 동생은 이제 고3이 되어서 히스테리는 엄청 심해지고.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난 군대가는 신청을 했어. 정말 군대를 가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민준이 점점 심하게 취해간다. 이제 민준이의 끝없는 말도 끝이 보여 간다. 이때부터는 맞장구를 잘 맞춰주어야 한다. 안 그러면 민준이한테 맞는다. 고등학교때부터 민준이와 술을 먹으면서 깨달은 나만의 노하우다.

 

“사실 군대에 가면 남은 식구들도 걱정이야. 그래도 민혜 이제 수능 끝나면 일하겠지. 그래서 군대 날짜도 민혜 수능 끝난 이후로 잡은 거야. 그래도 내가 일 하면서 어떻게든 돈 모은 거 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민혜가 알아서 잘 할 거야.”

 

“민혜는 대학에 가고 싶어 하잖아?”

 

“정말 어쩔 수 가 없어. 너무 견딜 수가 없었거든. 아빠가 집을 나간 지 일년 넘게 나는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이제 몸도 마음도 지칠 때까지 지쳤어. 이제는 조용히 쉬고 싶어.”

 

“맞아. 말도 안돼.....”

민준은 거의 오열을 한다.

 

“민혜야 미안해.. 자영아... 아.. 견딜 수 가 없어... 지난 1년간 너무 힘들었어.... 견딜 수 가 없어... 이제 정말 편히 쉬고 싶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어. 군대에 가면 몸도 마음도 지금보다는 훨씬 편할 거야. 그러면 군대가서 오랫동안 쓰지 못한 글도 써야겠다. 사실 너무 글이 쓰고 싶어. 나에게는 지금 필요한 건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야. 나에게 지금 어떠한 여유도 없어.”

 

 

v. 8

민준은 결국 술에 취해 쓰러졌다. 사실 지난 1년간 민준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고통을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대상도, 그럴 여유도 없었을 거다. 민준이 이렇게 힘들었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동안에 민준이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변했던가 보다. 도대체 돈이 뭘까. 한번도 돈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사실 민준의 말을 듣고도 민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가슴에 닿지 않는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민준을 보면 내가 과연 민준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그리고 내가 민준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끼의 식사와 술을 사주는 것밖에는 없다.

 

 

돈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할까. 술에 취해 쓰러진 민준을 질질 끌고 가면서 생각을 해보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돈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지 않아서. 내 지갑을 열어보니 밥값하고 술값으로 돈을 다 써서 집에 갈 차비가 없었다. 결국 민준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과방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돈이 너무 무서워졌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 집에 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다. 민준이를 바라보니 민준이가 술에 취해 쓰러진 건지 돈이 민준이를 쓰러지게 한건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너무 추워졌다. 빨리 과방에 가서 잠에 들어야겠다.

 

그렇게 질질 과방에 가서 민준을 눕혀 놓고 나도 누워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났던 그러나 사소하게 지나쳤던 일들이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간다. 마을버스 요금을 내고, 지하철 요금을 내고, 점심을 먹을 때 돈을 내고, 민준이와 함께 먹은 저녁 값과 술값을 낸 기억들이다. 어쩌면 내가 의식적으로 의식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어디에도 나의 기억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공간이 없다. 옆에서 민준은 쓰러져 자고 있다. 과연 민준에게 내일 하루는 새로운 하루일까? 과연 나에게는 새로운 하루가 올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은 나에게 너무나 긴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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