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그/독서 기록

아래아한글 필기체에 숨겨진 사랑 이야기가 있다고?(feat. 서체 디자이너 한동훈이 쓴 글자 속의 우주 후기)

동사힐 2022. 2. 25.

안녕하세요~ 작가 동사힐입니다. 😊

오늘은 서체 디자이너 한동훈이 쓴 책 글자 속의 우주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서체 디자이너이자 작가 한동훈은 누구?


글자 속의 우주 표지

글자 속의 우주를 쓴 작가 한동훈은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산돌커뮤니케이션을 거쳐서 지금은 박윤정&타이포랩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폰트 관련 실무 경험이 꽤 긴 유능한 서체 디자이너인데요, 꾸준하게 월간 <디자인>과 계간 <디자인 평론> 그리고 윤디자인그룹의 월간 <theT>에 글을 썼습니다. 꾸준히 쓴 글 덕분에 가독성 좋은 글솜씨를 보여주는데요, 서체 디자인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을 일반 독자도 알기 쉽게 풀어쓰는 역량이 상당히 탁월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작가가 쓰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시각자료 아카이빙에도 뛰어나서, 적절한 시각 매체 자료를 글과 함께 제시합니다. 저처럼 디자인 전공을 하지 않은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자 속의 우주 작가 한동훈

 

글자 속의 우주는 어떤 책이고, 무슨 의미를 담았는가?


글자 속의 우주라는 제목의 의미

세상의 글자 속 이야기가 모이면 우주가 된다.

 

글자 속의 우주는 작가 한동훈이 쓴 에세이입니다. 주제는 서체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와 관련된 내용이 주인데요. 한동훈 작가가 세상 속에서 주로 발견한 타이포그래피를 관찰하고, 촬영하고, 생각한 내용을 쓴 에세이입니다. 한동훈 작가는 그것이 곧 세상 돌아가는 일을 '글자'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행위라고 묘사했습니다. '글자'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도구라고 믿는 작가 한동훈, 그는 시골, 도시, 오프라인, 온라인 등 세상 모든 곳에 글자가 있고, 글자는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도 그 안에는 각각의 고유한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야기와 이야기가 모이면 세상이 되고, 우주가 되기에 '글자 속의 우주'라는 제목을 담았다고 합니다.

캪틴큐의 레터링 디자인

 

청구 아파트의 레터링

글자 속의 우주를 통해 사소한 것도 자세히 보게 된다


무쇠팔 최동원의 유니폼 타이포그래피
성심 치과와 손치과의원의 타이포그래피 차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저는 글자 속의 우주를 읽고 나태주 시인이 쓴 시 풀꽃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30여년을 살면서 수없이 많이 그냥 흘려 지나온 문자, 글자, 간판들. 그전에는 그저 무심히 흘려보내고는 했지만, 이제는 자세히 보면서 저 글자에는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동훈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바라보는 글자에 대한 사랑과 이해, 관심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저도 한동훈 작가처럼 세밀하고 구체적인 지식은 부족하지만 글자 하나를 꼼꼼하게 뜯어보는 사고를 연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4년 LA올림픽 엠블럼 마크
H워얼V의 폰트별 차이로 산돌 빛의 계승자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글자 속의 우주에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챕터


 

작가 한동훈의 지하철 표지 사인물 레터링, 이 책의 가장 큰 묘미
벌래체 폰트로 새오체에서 시작되었다

  1. 용어 구분이 먼저
  2. 주류 라벨 타이포그래피
  3. 한국와 미국의 치킨 타이포그래피
  4. 기자자동차 상징의 변천사
  5. 매킨토시의 탄생
  6. 초창기 비디오 게임 레터링 : 재미슥, 제미나, 그리고 신검의 전설
  7. 프로야구와 글자
  8. 올림픽과 로고타입 디자인
  9. 헤드라인으로 보는 월드컵
  10. 수도권전철 주변 글자들
  11. 예능 자막 타이포그래피
  12. 아파트 타이포그래피 3 : 네거티브 스페이스와 건설업체 심볼
  13. 사거리의 두 치과
  14. 야민정음의 세계
  15. 인터넷 밈이 타입스페이스로 -벌래체
  16. 세벌식 단상
  17. 한글 디자인 옵션

정성으로 건설하여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문구가 인상적인 4호선 역의 공사연혁
두벌식과 세벌식 3-91 프린팅이 함께 되어 있는 키보드

이렇게 17가지 글은 꼭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우선 서체 디자인 관련 전문어를 알지 못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글이면서 동시에 독자들도 일반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이면서도, 작가 한동훈이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타이포그래피를 관찰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섹도시발 예능 타이포그래피
가획 원리에 따른 'ㅌ' 폰트를 유심히 보자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아래아한글 필기체 미스터리는 꼭 읽어야 하는 글


아래아한글에는 필기체가 있습니다. 그 필기체의 탄생 기원을 엿볼 수 있는 글인데요. 사실은 90년대 인터넷 커뮤니티에 작성된 글을 작가가 아카이빙 차원에서 수록한 글입니다. 온라인의 글이 활자화되었을 때 느껴지는 오묘한 감정은 이루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도 글을 검색해서 읽을 수 있기에, 저도 여기에 전문을 싣습니다.

 

번호:740/814
등록자 SCJINSUK
등록일시:95/04/15 21:20
길이 115줄

제 목 : 아래아 한글 필기체 글꼴의 뒷 이야기

안녕하세요. 진돌스입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너무 힘들고 바쁘게 살아서
(더 바쁘게 사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마을 생활을 제대로 못했군요. 집에 들어와 잠만 자고 바로 나갔기 때문에...

오랜만에 글 하나 쓰려고요. 무슨 얘기를 할까 하다가,
문득 떠오른게 있어서 그걸 들려 드릴까 합니다.

바로 아래아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필기체 글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번 읽어 보세요. 아마도 미처 모르고 계셨던 이야기일테니...

지금엔 각종 전단물, 광고 간판, 자막 등등에 커다란 크기로
안 쓰이는 곳이 없는 아래아 한글 필기체는, 처음 나온 아래아
한글 버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죠.


제 기억으론 필기체 글꼴은 1.2버전부터 포함되었습니다.
그게 90년의 일입니다.


이 필기체 글꼴의 원형을 제공한 사람은, 당시 서울대학교
기악과(바이올린 전공) 학생이었던 '전성신'이라는 여학생입니다.
성신이는
89학번이고 1학년 때부터 컴퓨터 연구회에 신입회원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활동하던 여학생이었어요. 착하고 귀엽고....

친구인 우리들이 조르면 바이올린을 꺼내서 재미있는 곡들을
연주해 주기도 했죠. 지금은 미국으로 유학가 있어서 가끔 소식을
들을 뿐입니다.

성신이는 글씨를 참 잘 썼어요. 동아리 방마다 있는 잡기장
있잖아요 (저희는 그걸 열린글터라고 불렀는데), 거기다 글을 자주
써 놓고는
했는데, 워낙 알아볼 수 없는 악필들이 많아서인지

성신이의 글씨는 단연 눈에 뜨였죠.

성신이는 동아리 회지 원고를 프린터로 뽑지 않고
직접 써서 주기도 했어요. 이쁘니까.....


거 뭐랄까. 그냥 귀엽고 동글동글한 필체는 아니었고, 왠지
끄적거리듯 한 글씨면서도 보기 참 좋은 그런 글씨 있잖아요.
글씨 크기가 고르
지 않고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고,

하나하나 보면 대충 쓴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게 참 균형을
잘 이루어서 예쁘다는 생각이 걷
잡을 수 없게 드는 글씨였습니다.
이런 글씨로 쓴 편지 한번 받으면 정말 좋겠다 하는 그런.....
해가 바뀌고 90학번 신입회원들이 들어왔죠. 당연하게도 상냥하게
후배들을 대하는 성신이를 누나 누나 부르며 따르는 남학생들이
많았
어요. 그 가운데 컴퓨터 실력이 뛰어나고 겸손해서 선배들의
많은 귀염을 받았던 후배 가운데, 형석이라는 녀석이 있었어요.

(형석이가 이 글을 너그럽게 봐주어야 할텐데...)


형적인 좀 수줍음을 타는 편이어서, 성신이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별로 말도 못하고 그냥 속으로만 감추고 있었던거죠. 나중에
형석이 생일 때 진실게임하면서 다 들통이 났지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컴퓨터용 한글 글꼴을 디자인한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예요.

미적 감각과 함께 엄청난 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죠.

한글 글꼴에 관심이 많던 형석이니만큼, 좋아하는 성신이 누나의
글씨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겠어요.

어느 날인가 FE라는 성능 좋은 글꼴 편집기를 하나 만들더니,
곧이어 성신이의 글씨를 아래아 한글에서 쓸 수 있게 글꼴 한 벌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모임방에 가보면 글꼴 에디터로 아무 말도 없이 뚝딱거리며 글꼴을
만들고 조합해 보는 형석이의 모습을 이따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형석이는 그 힘든 작업을 마침내 끝내고 나서 우리들에게
그 글씨를 선보였죠.

컴퓨터에서 찍혀 나오는 글씨라고는 명조체, 고딕체 등 정형적인
것만 보던 우리들 앞에, 프린터로 드르륵 드르륵 찍혀 나오는
성신이의 글씨를 닮은 글꼴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
었던지요.

동아리 사람들은 그걸 모두 글씨의 원주인인 성신이의 이름을 따서
'성신체'라고 불렀어요.

아무래도 그 성신체 글꼴은 실제 성신이가 쓰던 글씨와는 조금
차이가 나요. 초성, 중성, 종성의 벌수가 많지 않아서, 글자마다
다양한 스
타일이 배어있던 사람의 손글씨를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무리였죠. 당사자인 성신이가 제일 민감하게 느꼈겠지요.

'이거 내 글씨하고 많이 닮았니?'하고
조심스럽게 우리들에게 묻기도 했어요.

아무도 직접 그렇게 한글 글꼴을 손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저를 비롯한 동아리 회원들에게, 형석이가
든 성신체 글꼴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작업은 형석이가 선배 누나 성신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 (이렇게 불러도 되나)이 없
었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이거지요. POWER OF LOVE!!

처음엔 화면용 글꼴은 없었고 프린터 출력용 글꼴만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출력용 글꼴을 고쳐서 화면에도 필기체가 나오게 되었지요.
아래아 한글의 글꼴 설정 메뉴에도 '성신체'로 표시하려다가,
성신이의 완곡한 사양으로 그냥 '필기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글꼴을 만든 형석이는 지금 선배형들을 따라
(주)한글과컴퓨터에 입사해서 열심히 아래아 한글 및 부속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있습니
다. 얼마 전에 들은 소식으로
여자친구도 생겼다고 하더군요. 후....

요즘은 참 필기체 글꼴들이 많죠. 그 글씨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건 원래 어떤 사람의 글씨였을까....

누가 그 글씨를 정성껏 다듬어 글꼴로 만든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진돌스!

출처는 https://hangul.tistory.com/101

한동훈 작가는 이 글에 약간 오류가 있다면서 아래아한글 1.2 구동 화면을 보면 1990-1-8이란 날짜가 있는데, 판매되는 상품에 넣는 공식 날짜가 몇 개월씩 차이가 날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거의 없기에 90학번이라는 후배가 1.2에 필기체를 탑재시킬 수는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래아한글에 필기체가 들어간 것은 1991년 1월로 버전은 1.51이었습니다. 아래아한글 출시 초기의 체계적이지 못한 시스템으로 인해 작성자가 작성 시점에서 4~5년밖에 안된 일임에도 착각하는 건 당연한다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동훈 작가는 자신의 감으로 이 글은 사실일 것이라면서, 이 글의 작성자 진돌스는 진석일 것이라고 한글 사용자클럽 진돌스님에 대한 제보를 부탁드린다면서 글을 맺고 있습니다. 상당히 여운이 있는 글인데요, 마치 건축학개론과 같은 느낌을 주는 글입니다. 

신입생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와 건축학이 결합한 영화 건축학개론
저 글을 읽으면서 상당히 재밌던 것이 컴퓨터 연구회라는 상당히 덕후스러운 동아리에 기악과 바이올린 전공의 학생이 가입했다는 점인데요. 서울대학교라는 특성상 음대생도 너드의 기질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묘한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졌을법한 잡기장 - 열린글터라고 불리는 그것-인데요. 저도 학부 다닐때 글적이라고 해서 동아리실이나 과방에서 끄적였던 기억이 납니다. 1990년대 대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이렇게 폰트에도 제작과 관련된 스토리가 있는데요. 아래아한글의 필기체에도 이와 같은 청년의 피, 땀, 눈물 그리고 사랑이 담긴 스토리가 있다니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배달의 민족 도현체, 주아체 같은 경우 배달의 민족 근무자의 자녀들 이름으로 지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만약 필기체도 성신체로 불리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의 전설은 계속 되었을 법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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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동사힐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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