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기호와 지시체 간의 관계에 대한 짧은 에세이(feat. 마그리트와 윌리엄 웨그만을 통해 살펴보는 언어와 대상의 관계)

동사힐 2021. 9. 7.

안녕하세요~ 작가 동사힐입니다. 😊

오늘은 오랜만에 인문학의 주제인 기호와 지시체 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주제로 쓴 저의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에세이 형식으로 자유롭게 쓴 글이니 편하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0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200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그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서둘러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신촌역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날은 연세대학교 논술고사일. 그때 나온 지문은 바로 언어와 기호에 관한 것이었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바로 위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파이프 그림이지만 밑에 써있는 글씨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써있다. 이 그림은 마그리트가 그린 그림이다. 마그리트 그림은 지시대상으로서의 실제 파이프와 파이프에 대한 그림으로서의 도상적 기호, 그리고 "파이프"라는 언어적 기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 그림의 제목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마그리트는 파이프라는 지시대상과 그림 그리고 언어 사이의 등가 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실제 파이프와 그림 속의 파이프, 그리고 '파이프'라는 말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그림 제목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마그리트는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2003학년도 연세대학교 입학의 논술문제로서의 제시문에서는 이미지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당시의 나는 너무나 어린 학생이었고, 언어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논술문을 제대로 쓰지는 못했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그때의 부족함을 만회하고자 하는 마음과 언어와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찾아내고자 한다.

 

기호란?


우선 기호에 대해서 살펴보자.

 

처음에 읽은 책은 기호학과 언어철학이다. 이 책에서는 기호와 세미오시스(기호현상)의 둘을 기호현상에서 연구를 한다. 기호는 보통 기표와 기의사이의 상호관계로서 여겨진다. 그러므로 한 쌍 사이의 작용이다. 피어스에 따르면 기호현상은 <작용 또는 영향이며 이것은 기호, 그 대상 그 해석 소와 같은 <> 주체들의 작용이거나 그것을 개입시키는 것으로 이 삼자관계 의 영향은 어떤 방법으로도 두 쌍 사이의 작용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해석의 원칙은 <기호란 우리가 그것을 앎에 의해서 더 이상의 무엇을 알게되는 무엇이다> 라고 했다. 또한 <한 텍스트의 참된 의미는 없다> 라고 했다.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기를 기호란 <그것의 결과와의 타당하고 드러나는 연관에 의해 규정된 하나의 명제> 라고 했다.

대응하는 대상 그리고 개념에 대해 의사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동물 그림처럼 구체적 대상들을 재생산하는 여하한 시각적 절차들도 모두 하나의 도상적 기호인 것으로 고려된다.

 

그림들은 기호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재현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재현된 대상이 대신하는 바의 <다른> 내용을 인식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게 된다.

 

기호학과 언어철학


이렇게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었다기 보다는 거의 보았다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잘 정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본 책이 언어철학연구 v.1 비트겐슈타인과 언어 v.2 현대언어철학이다. 이 책 또한 어려웠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뽑아 낼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사상은 반영론과 비슷하다. 그림이론이라고 하는데 단어는 사물의 이름이이고 문장은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림이다. 명제들은 물질이 원자로 나누어지듯이 요소명제로 나누어지며 이 요소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 있다. 그리고 명제 전체의 참과 거짓은 요소명제들의 진리 함수라고 한다. 반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단어가 사물의 이름이라는 것부터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리고 나 언제처럼 이름 아닌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단어의 용법이라는 것이다. 즉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의미는 결정된다는 것이다.

 

언어의 그림이론 만큼이 마음의 그림 이론의 전통은 확고한 것 같다. 데카르트가 나는 나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또한 나만이 나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 말할 때, 그가 가지고 있던 관점은 마음의 사적인 그림 이론이었다. 그것은 의미의 지시론과 마음의 사밀 성의 결합 물이다. 즉 마음의 사적-그림이론은 , 심적 술어가 지시하는 것은 각자 자신만이 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적 대상이라는 것 그래서 심적 술어의 의미나 심성 내용은 자신의 내부를 관찰하는 내성의 방법으로 마음 안의 사적대상을 지시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그림 이론은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즉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적 의미론 내지 유아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경우 상호 객관적인 언어사용은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내용과 의미의 총체적 합리성이 어떻게 공공성을 함축하거나 그것과 양립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내용론과 의미론이 공통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자비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데이비슨의 심리철학과 언어철학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비의 원리를 고려할 때, 그것은 합리성 합의성 진리성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원리는 다음 세 명제를 함축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1) 사람들의 믿음들은 내적으로 일관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피해석자에게 귀속하는 각각의 믿음이나 사고들은 우리가 그에게 귀속하는 다른 사고들을 합리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합리성의 원리다.

(2) 사람들의 믿음은 대부분 일치한다. 즉 원초적 해석 상황에서 해석 자와 피해석자에게 부여하는 믿음들은 자신의 사고들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한다. 그리하여 해석자가 피해석자에게 부여하는 믿음들은 자신의 사고들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한다. 합의성/일치성원리이다.

(3) 사람들의 대부분의 믿음들은 참이다. 이것은 믿음의 일반적 특성은 진리를 함축한다는 것으로서 믿음개념과 진리개념의 불가분의 관계를 나타낸다.

 

언어철학연구


이렇게 읽었지만 막상 내용은 잘 모르겠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다시 한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을 살펴보자. 분명 그림은 파이프그림이지 파이프는 아니다. 그렇다면 파이프라는 기호는 실제 파이프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실제 파이프를 지시하는 파이프라는 기호는 무얼 지시하는 것일까? 지시 체와 만날 수 없는 기호는 대체 무엇에 쓰는 것일까? 너무나도 많은 의문점들이 생겨났다.

 

우선은 위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외부의 세계와 언어, 그리고 실재라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실재적인 파이프를 전달하는 도상적 기호로서의 그림과 언어와의 관계는,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과의 굴절이나 왜곡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약호화 와 해독화 과정에서 메시지에 대한 소음으로 인해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이것은 파이프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파이프의 그림, 즉 실제 파이프에 대한 도상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파이프는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구나'라는 생각을 할 때 파이프'라는 언어도 그런 모양과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을 파이프라는 언어로 부른다는 약속이 있을 뿐, 그 언어가 파이프 자체나 혹은 파이프의 도상 자체일 수는 없다. 그림은 파이프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며, 파이프란 말도 실제 파이프를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기호들이 그렇다. 실제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표현하는 언어나 그림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모두를 동일한 것이라는 개념으로 일상적인 언어생활을 하고 있으나 각각은 대상과 기호일 뿐이다. 기호가 비록 대상을 표현하거나 지칭한다해도 그 대상 자체는 아님을 마그리트의 그림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첨가함으로써 전달하고 있다.

No Fun Sleeping Under A Picture Like This + Pink Elephants

그런데 또 다른 새로운 그림을 발견했다. 바로 윌리엄 웨그만 (William Wegman)의 그림이다. 바로 코끼리 그림이다. 웨그먼이 개의 신체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놓고는 밑에다 코끼리라고 써 놓은 그림이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양말을 쓰고 상아 장식을 단 개일뿐이다. 그러나 코끼리라는 제목이 상황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있는 것이 여태껏 대상과 기호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호가 대상에 스며들어가 대상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양말을 쓰고 상아장식을 한 개가 코끼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시 체와 기호가 만날 수 없다면 대체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이렇게 궁금증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는 것으로 만족을 얻어야 할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해가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전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의문점만 계속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사유 끝에 조금이나마 기호와 지시체 간의 간극을 좁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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