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성령의 거듭남

동사힐 2013. 7. 14.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하신 내용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죄악 가운데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반드시 구하겠다는 의미인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이 말씀이 선포된 그 당시의 배경 컨텍스트를 우선 이해해야만 한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앗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할 것을 이미 앞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다. 그러한 멸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다.

얼마나 이스라엘의 죄악이 컸으면 하나님께서 멸망이라는 방법을 이용하셨을까? 그만큼 이스라엘이 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갔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의 왕이자 평강의 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로 멸망을 선포하시지만 멸망이 목적이 아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0장을 기점으로 평강을 선포하신다. 즉 1에서 39장까지는 "의" 즉 심판을 선포하시만 40장부터 66장까지는 결국 "평강" 즉 구원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43장 18,19절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전 일과 옛날 일을 지우라 하신다. 이것은 과거 즉 옛습관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더이상 하나님께서는 묻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라" 하신다. 19절의 "내가"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우리는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라 하나님의 새 일 하심을 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설의법(알지 못하겠느냐)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일하심을 강조하신다.

바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가보다'로 해석해도 무방하나 그것보다는 문학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이다.

광야는 인적이 없는 곳. 그 곳에 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막에 강 역시 불가능.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이루신다는 표현을 통해서 불가능해만 보이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고려가요 "정석가"를 떠올리면 쉽다. 불가능한 표현을 통해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역설법의 "정석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을 드러내시며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시 죄 가운데 거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드러내며 동시에 지금 죄 가운데 거하여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우리에 대한 사랑과 구원을 나타내신다.

더이상 과거에 연연해 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라. 하나님께서 직접 새 일을 하시니까.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1. 도대체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새 일은 무엇인가? 정말 광야에 길 내고 사막에 강 만드시는 것일까?

2. 그리고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정말 새 일을 하셨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말씀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새 일은 바로 우리의 구원. 즉 거듭남이다. 고린도후서 5장17절의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두번째 정말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하셨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하반절 말씀 "새 것이 되었도다"이다. 시제에 유의해야 한다. "되었도다" 즉 과거형이다. 이루신 것이다. 어떻게 이루셨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셨다. 즉 이사야 43장의 언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

그렇기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조건절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값을 이미 지불하셨기에 우리는 새 피조물 새 것이 되었고 그것 곧 하나님께서 행하신 새 일이다.

이렇게 죄 그 자체인 우리가 새 것이 되어서 구원을 얻었다니 정말 사막에 강이 생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된다. 이미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 구원의 감격만 정확히 인지하고 누린다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 인식이 힘들다. 나조차도 나의 어떤 공적 선한 행위 기도함 예배드림 등의 업적으로 나를 높이고 구원의 조건을 내세우려 한다. 그것을 온전히 버리고 오직 보혈에 의지하여 겸손해질때 진정한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러 하셨나니" (딛3:5)


디도서 3장 5절 말씀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성도들은 기도, 말씀, 예배, 구제사역, 봉사, 선교 등의 행위로 자꾸 나의 선함 성결함을 드러내려하고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려 한다. 구원은 오직 무엇때문인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자꾸 잊는다. 특히 새벽기도를 8주동안 꾸준히 나가면서 오히려 나는 나의 쌓음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나의 죄인됨 겸손함을 잃었다. 다시 한번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고 그로 인해 내가 새로 거듭났음을 믿는다.

다시 한번 주님의 긍휼함을 전적으로 구하며 내 안에서 이미 이루신 새 일을 보는 내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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